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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고전 회원으로 가입하고 선택한 5권의 책 중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가장 얇은 두께의 책이다. 처음엔 고전이라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읽고 넘어갈 연애 소설 인가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예사롭지 않은 책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미묘한 감정, 사랑이라는 그 난해하고 모호한 감정으로 인해 느껴지는 행복, 불행의 감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깜짝 놀랐다. 다 읽고나서 남겨지는 묵직한 사랑과 인생에 대한 주제의식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미도리의 고전 읽기 ①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스인들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아는가? 쇼팽도 아니고 모짜르트도 아닌 브람스 말이다. 사실 프랑스인들은 보통 비장한 브람스의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p56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한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경험이란 좋은 것이다. 좋은 지표가 되어 준다. -p5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실내 장식가인 '폴'과 그의 연인 '로제' 그리고 '시몽'의 이야기이다. 서른 아홉의 폴(한번 이혼 경험, 나랑 동갑이구나)과 로제는 5년간 사귄 익숙한 연인 사이다. 때로 젊은 애인과 잠자리를 하는 자유분방한 로제로 인해 폴은 언제나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다 스물 다섯살의  부유하고 잘 생기고 몽상가 기질이 있는 젊은 수습 변호사인 '시몽'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받으면서 신선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나는 폴에게 빠져 일조차 팽겨치고 그녀만 바라보는 헌신적인 시몽(무려 15살 연하 ㅠㅠ)을 두고 다른 여자와 밀애를 나누며 거짓말을 하는 시몽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폴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식어빠진 사랑(혹은 정)이냐 신선한 사랑이냐. 결국 지금은 한껏 달아오른 시몽의 사랑도 결국은 식고 변질될 것이라는 것을 폴은 이미 알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조금 슬펐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해 매우 냉정하다. 우리는 보통 행복해지기 위해 새로운 사랑보다 기존의 사랑을 지키려 노력한다. 어떤 나이를 넘어서면 더 이상 100%의 열정을 쏟기 어려운 기분을 느낀다. 무엇에건 자기 자신을 잊고 온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게 된다. 현재 내가 이룬 것, 가진 것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다시 반복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십년 뒤에도 그가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라고 물어보면 답이 좀 더 명확해 보일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던 영화 '봄날은 간다'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오른다. 우리는 누구나 청춘을 거쳐오면서 사랑의 열병을 앓았고, 사랑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가, 채 1년이 가지못해 어이없게 식어가는 것을 지켜봐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에 또 헛된 기대를 건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진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묻는다.

"그대 아직도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설득보다는 매혹을 원했던 프랑스 최고의 감성, 유럽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로 불리우는 그녀의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Francoise Quoirez)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사강을 필명으로 삼았다. 그녀는 1935년 프랑스 카자르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소르본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19세 때 발표한 장편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작품으로 1954년 프랑스 문학비평상을 받았다.

프랑수아즈 사장이라는 작가의 이력이 아주 화려하다. 그녀의 이런 연애편력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작가로서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그녀가 95년 환갑의 나이에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한 멋진 말만 보아도 얼마나 그녀가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는지 알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사강의 작품들은 인생에 대한 사탕발림 같은 환상을 벗어버리고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인간의 고독과 사랑의 본질을 그리는 작가이다.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감성과 섬세한 심리묘사로 여전히 전 세계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강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p43~44

당신은 로제를 사랑하지만 지금 혼자 있습니다. 당신은 일요일마다 혼자 있겠지요. 당신은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아마도 종종 혼자 잠들겠지요. 하지만 저라면 당신의 옆에서 잠들 겁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당신에게 입 맞출 겁니다. p.64

그(시몽)에게는 끈질긴 인내심과 넘치는 애정, 그리고 물론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인내심과 애정이 있다는 것, 자신 앞에 긴 인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단계일 뿐, 흔히 예상하는 익숙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낮과 밤이 펼쳐져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그녀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꼈다. p.83

로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p.86

시몽이 현재의 생활에 진력이 나면 그녀에게 와서 불평을 늘어놓고 그녀를 되찾으려 하리라. 그리고 아마도 성공하리라. 시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고, 그녀 자신은 또다시 고독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리라. 그녀는 자신의 숙명, 이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그 느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그렇긴 해도 그녀는 시몽과 함께 살고 있었다.  -137p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 1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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