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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하루키 신간이 나오면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거에요?' 나는 대답했다. '책임감이죠.' 상대가 말했다. '흠..뭔가 좀 무서운걸요'
그렇다. 나의 20대를 관통해 30대를 지배한 하루키는 이제 나에게 읽고 싶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어떤 책임감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의 글이라면 언더그라운드와 같이 엄숙한 글이든 1Q84처럼 3권의 두꺼운 장편이든, 이번 책처럼 가벼운 잡문집이든 기꺼이 마다하지 않고 사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한 회사의 마케팅 문구처럼 하루키 문학의 집대성이라 한 건 좀 허풍이 심하고 그저 잡문집이라고 하는 것이 딱 어울린다. 30년간 각종 잡지나 신문 등에 기고해 온 글이나 시상식의 소감문, 인사말, 대담, 번역한 책의 저자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책 서문, 짧은 픽션 같은걸 모아서 낸 것이니 말이다.

대단한 하루키 문학의 정수쯤을 기대하고 이 책을 산 독자라면 실망할 것이 뻔하다. 그런거라면 다른 책도 많으니 그 모두를 다 읽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절대 거창한 기대는 금물이다. 하루끼가 이 책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입니다. 복주머니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복주머니니까요." _무라카미 하루키

초콜릿이 든 상자에서 맛있는 사탕 먼저 먹고 나면 나중에는 맛 없는 것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확실히 소확행을 사랑하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그냥 이런 소소한 기분으로 읽고 마음이 따뜻해지면 그만이다.

나는 그가 굴튀김을 앞에 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셔츠를 다림질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스 섬에서는 아내와 어떻게 살았는지, 레이먼드 카버와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호밀밭의 파수꾼'을 번역했는지, 작가로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베스트셀러인 노르웨이의 숲(Norweign Wood)이란 책의 제목이 사실은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 아니라 'Isn't it good, knowing she would?'라는 뜻을 바꿔 말한 것이라거나, 그가 애당초 소설가가 될 생각이 없고 재능도 없다고 생각하고 희망을 말살하면서 음악을 직업으로 하고 책읽기를 취미로 하기로 한 것도 재미있고 신선했다.

 (아, 이걸 모두 타이핑하느라 죽을 뻔 -,.- 이정도면 인용의 저작권법에 걸리는건가 ㅠ)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든 이 세계에는 책이라는 형태로밖에 전할 수 없는 생각과 정보가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활자로 된 이야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움직임과 떨림이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지난 삼십 년간 꾸준히 소설을 써왔습니다. '꾸준히 써나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지금 무엇보다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 p.79  제 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 p.90 벽과 알 - 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

있잖아, 엄마, ‘전후 민주주의’라는 게 뭐야? 그때부터 인간은 사랑 없이도 ‘섹스’를 한다던데 그게 진짜야?--- 사랑 없는 세계

솔직히 나는 사회가 열악해지고 있다고 쉽게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회는 딱히 좋아지지도,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고, 그저 나날이 다양한 형태의 혼돈에 빠질 뿐이지 않을까, 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그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중요한 진실은 오히려 그것이다. - p.247 언더그라운드에 관하여

그는 평명하고 간결하며 일상적인 언어만으로 소설을 쓰고 또 시를 썼다. 그것이 작가로서 그가 취한 일관된 태도였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 여기저기서 기모하고 깜짝 놀랄 만한 비일상성이 깃들어 있고, 저도 모르는 새 터져나오는 열려 있는 유머 감각이 있다. 그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사실성이 있다.
- p.305 레이먼드 카버의 세계

셔츠 한 장을 십 년 가까이 빨고 말리고 다름질을 하다보면, 거기에는 나름대로 대화 같은 것이 생겨난다. 나는 절대 멋쟁이도 아니고 옷에 그다지 돈을 들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매일매일 옷을 입고 생활할 수 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옷과 약간의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된다.  - p.383 올바른 다림질 법

꽤 자주 쓰이는 영어 표현 중에 '빨간 청어 red herring'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구태여 하자면 '원래 목적인 본론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부러 꺼내는, 흥미는 가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없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빨간 훈제 청어= 목적에서 일탈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원 하나를 새로 알면 조금 똑똑해진 기분이 든다. 실제로 별 도움이 되는 지식은 아니지만. - p.387~388

인간이 제아무리 사력을 사력을 다해 뭔가를 추구해도 그 분야에서 사람들의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다 -  p.391 잭런던의 틀니

인간이 진정으로 바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인생 중에 아주 짧은 한 시기일뿐일 것이다. - p.398 바람을 생각하자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 p. 407 다른 울림을 찾아서

<작가로서 은퇴를 그리고 계신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언젠가 썼듯이 나는 장거리 주자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오래 살면서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소설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을 갱신해나가고 싶습니다. 꾸준히 버전업하고 싶은거죠.  - p.414 질문과 대답


이 책의 미덕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가 아무리 자신을 재능이 없는 노력파 작가라도 아무리 겸손히 말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범한 평범함의 소유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에 반짝이는 의미를 부여하고, 특별할 것 같은 평범한 언어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책에는 작가 하루키는 그의 문학론, 번역가로서의 번역론, 음악 애호가로서의 깊이 있는 재즈에 대한 해석, 유쾌한 독서론,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따뜻한 인생론, 그리고 주위의 친구들, 번역 원작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내가 블로그를 통해 매일 쓰는 글은 그냥 그야말로 잡문(雜文)인데, 하루키가 쓴 글은 잡문도 문학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그나저나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하루키 아저씨가 내 곁에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그런 기분이 든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은품으로 받은 하루키 미니 달력. 책속의 문구와 일러스트과 귀엽다.



[관련 링크]
그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
하루키, 소설같은 인생
하루키를 명문장/명대 모음
왜 무라카미 하루키인가?
하루키 소설의 비밀열쇠

무라카미하루키잡문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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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che 미도리님! 반갑습니다. 페북에서만 글을 쓰다가 여기서 글을 쓰니 감회가..ㅋ
    저는 어제부터 읽고 있는 중이라서 사실 미도리님의 글을 깊게 읽진 않았습니다만...
    저는 잡문이라 여기 읽고 저기 읽고 하는 중에 위에 노르웨이안 숲에 관한 에피소드에 관해서만 제가 읽은거라..다행이라는 생각.^^

    저도 곧 더 읽고 위에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할께요~
    2011.11.23 10:31 신고
  • 프로필사진 che 옙!! ㅎㅎㅎ 오늘도 벌써 반이나 읽었어요 2011.11.24 20: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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