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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80년대 단편문학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을 수록한 이 보석같은 책을 접한 것은 부록으로 작품 해설을 써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었다.

평소 단편에서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 종종 언급해온 하루키인지라 궁금증이 일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하기도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우리가 가볍게 여기는 일상의 모습들, 즉 네 명의 남녀가 각자의 사랑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 이발소에 온 사람들의 수다와 시비(고요), 비타민 판매원 이야기(비타민) 등을 각각의 단편소설이란 장치를 통해 투영한다. 그렇지만 타조를 키우는 친구의 집(체프의 집), 부인의 맹인 친구와 함께 그림을 그려보는 이야기(대성당) 등은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무척 사실적이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느낌들을 전달해 감동을 준다.

레이먼트 카버의 소설집에서 내 마음을 움직인 단편은 다음 4편 정도다. 동생과 질이 나쁜 가족과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이혼한 중년남의 고민 이야기(코끼리), 재혼한 두 부부가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나누는 대화(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 파파가 겪는 이야기(열병),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고 제과점에서 빵으로 위로를 받는 부부 이야기(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일)는 무척 공감이 가고 생생하여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끈덕지게 붙어있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의 소재나 구성, 결말은 마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연상시킬 정도다. 생뚱맞게 굴뚝청소부 여성과 결혼을 한 알콜중독자 J.P.의 캐릭터는 참 독특하다. 하루키는 <그녀가 받으면 난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나야">라는 마지막의 간단한 한줄이 매우 인상적이다고 했는데 이는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모두가 우리 주변에서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이지만 생생한 묘사와 이야기 전개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자면,
그의 문장을 번역하면서 언제나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은 참 정직하게 단어를 선택해서 문장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정말로 자신의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통과한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기서 작가가 지닌 영혼이 숨소리를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책 페이지 페이지를 넘길 때면 이상하게 개인적인 온기조차 느끼게 된다.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내 생각]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공통점
: 일상성, 단편소설이 백미, 따뜻한 인간미, 인상적인 마무리, 주인공이 주로 남녀 커플인 점. 타블로의 소설인 '기억의 조각들'과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신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레이먼드 카버 (집사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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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주위가 캄캄해진 다음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죽은 듯이 앉아 있는 그 주방 식탁에서, 사람이 내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 p.56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바로 그 순간, 칼라일은 그렇게 현관 앞에 서서, 무언가가 그 막을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 무언가는 에일린, 그러니까 이 순간 이전까지의 인생과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에일린을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있기야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칼라일은 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그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삶은 한때 조금 전 그가 웹스터 부부에게 얘기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이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고 몸부림쳐 왔지만, 그렇게 흘러가 버린 과거 역시 이제 그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뒤에 남겨 놓은 그 모든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 p.163 열병

"내가 만든 핫 롤을 좀 들어 보지 않겠소? 뭔가를 먹는다는 건 아주 사소하지만 이런때는 그보다 더 도움이 되는 일도 없을거요."
그 빵을 삼키는 기분은 마치 현란한 형광등 불핓 속에서 가슴까지 시원한 햇빛 아래로 나온 것 같은 맛이었다. 그들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창문에 희미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p.258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일

2009/01/13 - 블로거들이 하루키에게 꼭 배워야 할 덕목
2008/12/21 -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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