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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가 9년 만에 돌아왔다. 팬들을 질리도록 기다리게 하기로 유명한 이 감독은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라는 걸출한 스타들을 캐스팅해 무려 3년간의 촬영/편집 기간을 거쳐 우리의 애간장을 녹일대로 녹인 채 드디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중국이나 홍콩 무협 액션 영화라면 질색하는 내가 일대종사를 선택한 건 당연히 왕가위와 양조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나처럼 무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이라 해도 내가 이 영화를 권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무협 영화이자 애틋한 멜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네 쿵후 실력을 함부로 내세우지 마라. 너의 문파가 최고라 말하지 마라. 쿵후, 그것은 오직 하나의 수직과 수평의 만남." - 엽문의 나레이션 중에서 


일대종사(一代宗師)란 각 무술 문파에서 한 시대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스승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장쯔이(궁이)의 아버지인 궁대인이 일대종사라 할 수 있는데 후계자로 뉴페이스인 양조위(엽문)을 눈여겨본다. 


홍콩영화에서도 드물게 보는 정통 맨손 권법인 '영춘권'의 대가인 '엽문'의 생애를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왕가위는 역시 그만의 스타일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무협 액션"을 만들어냈다.


그간 왕가위가 제멋대로 즉흥적으로 촬영해 스토리를 이어붙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면 이번에는 '엽문'이라는 대가의 실화를 다룬 점에서 부담감이 컷을 것이다. 이 영화는 무협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인물의 심리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가 될 것이다.  


# 양조위(엽문 역)

왕가위는 엽문이라는 캐릭터 안에 그가 하고 싶은 감정들을 투영해냈다. 역시 양조위는 왕가위의 페르소나였다. 그의 이전 작품 '화양연화'에서 각자의 배우자를 두고 애틋한 관계를 나눴던 주 선생(양조위)과 수리첸(장만옥)의 모습도 보이고. '동사서독'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구양봉(장국영)과 한 여인(장만옥)의 관계도 엿보인다. 


불산이 일본에 점령되자 궁핍한 생활을 하다 전쟁으로 두 딸까지 잃게 된 '엽문'은 전후 홍콩에 정착해 '영춘권'을 대중에게 전파하며 다시는 아내가 있는 중국 본토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소룡도 그의 제자 중 하나. '엽문'을 통해 상하이에서 태어나 새로운 고향 홍콩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왕가위 감독 자신을 투영하는 듯도 하다.


실제로 '엽문'의 손자로부터 4년이란 긴 시간동안 무술을 사사받드라 힘들었을 텐데 영화 속 그의 모습은 어색함이 전혀 없이 '영춘권'을 몸에 착 붙인 듯 도도하고 멋지다!!!! 폭우가 쏟아지는 영화 초반 우중액션 대결에서 모자를 쓴 채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정교한 무공을 뽐내던 그 자태란! Amazing~  (이 장면을 30일간 매일밤 비를 맞으며 촬영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 장쯔이(궁이 역)


시대는 1930년대 일제침략기, 중국 쿵후의 세대교체기. 새로운 실력자인 양조위(엽문)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궁대인과 그에 반대하는 딸 궁이(장쯔이)가 그가 대결하는 과정에서 엽문의 실력과 인품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엽문과 궁이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 (나중에 복수를 위해 포기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에로틱하게 느꼈던 장면은 엽문과 궁이가 금루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거의 춤을 추듯 합을 겨루는 대결 장면이다. 이 대결은 생사를 건 싸움이기보다 탱고를 추듯 두 사람의 은밀한 교감을 보여주는데 감독의 말에 따르면 '마치 멋진 섹스를 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때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마음을 주고받지만, 수 십년 후 궁이가 죽기 전 마지막 만남 이전까지 한번도 표현하지 않은 애틋한 감정이다. 서로에게는 아내와 남편이 있고, 감내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장쯔이는 영화 후반부에 붉은 립스틱을 딱 한번 바르고 등장하는 것외에 영화 내내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등장하는데 그럼에도 화려한 금루의 여인들에게 뒤지지 않는 품격있는 아름다움으로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눈발이 흩날리는 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기차역에서 털코트를 입고 차가운 표정으로 우아하게 대결을 벌이는 장면도 어찌나 아름답던지....

# 송혜교(장영성 역)


송혜교가 왕조위의 러브콜을 받고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긴 시간동안 그녀가 홍콩을 오가며 포기해야 했던 것은 엄청나게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영화 속 그녀의 비중은 다소 실망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엽문의 아내로서 그녀의 존재감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중국어 대사 연기 문제로 '사소한 말실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는' 과묵한 부인으로 등장하는 건 좀 안타깝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말보다는 눈빛과 행동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부유했던 시절 남편이 밤늦게 돌아오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던 장면은 무척 애로틱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후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은 다소 어색하지만, 전반적으로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가 너무나 잘 어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나온다. 여배우에게 이보다 큰 보상은 없으리라.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일대종사 

이 영화는 액션 마니아들에게는 무협의 역사를 찬찬히 풀어내는 액션 영화이지만,

나같은 여성들에게는 두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다룬 멜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은 '결국 인간은 혼자다'라는 실존적 고독을 무술을 화두로 풀어 낸 인생 영화라 할 만하다.



이제 무술도 권법도 한 시대를 풍미하던 시절은 지나고 '일대종사'의 시대도 화양연화처럼 아쉽게도 끝이 났다. 우리 모두에게도 빛나고 화려했던 시절은 있었으리라. 결국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덧1]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은 애잔한 영화 음악이다. 가급적이면 사운드 전용관에서 감상하시길.

[덧2] 이 영화에서 엽문에게 가장 아름답고 봄날이었던 시절은 40 이전으로 묘사된다. 그 이후 인생은 그저 추억을 회상할 뿐인가... 

[덧3]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네글자인 이유인 무엇일까?

[덧4] 언론에서 송혜교를 두고 '6분 존재감'이라고 비꼬는 건 좀 너무하다. 영화 출연분량보다 연기력을 봐야하지 않나? 



일대종사 (2013)

The Grandmaster 
7.9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 장첸, 조본산
정보
무협, 액션 | 중국, 홍콩 | 122 분 | 201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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